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탤런트 한인수 장로 - 풍성한 열매는 오직 주 안에 거할때만 가능합니다

by 정보톡톡01 2023. 5. 21.

 

장로님께서는 어머니으로부터 신앙을 물려받고 6·25사변때 황해도에서 월남하여 어렵고 힘든 어린시절을 보내면서도 주님의 인도하심을 경험하셨습니다. 그 이야기와 어머니는 어떤 분이셨는지 말씀해주세요.



어머니는 부모님을 엄청 공경하셨고 아버지께 맞서는 것을 한 번도 보지 못했습니다. 한국의 여인상 그대로 순박하고 남에게 베풀기를 잘 하시는 분이셨습니다. 어머니께서 권사님으로 소천하셨는데 이 세상에 있는 동안 궂은 일도 다 해보시고, 음식 싸온 것도 다 주변에 나눠주시며 그저 순종하며 열심히 사신 분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어머니가 정말 대단하신 분이며, 믿음 생활도 열심히 하신 분으로 제 기억 속에 남아있습니다.

저는 태어날 때부터 예수님을 믿은 모태신앙은 아닙니다. 제 고향이 황해도인데 4살 때 연평도로 피난을 나왔습니다. 그 당시의 삶은 정말 비참하기 그지 없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장티푸스가 유행했었고, 저는 장티푸스에 걸려 두번이나 앓았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오늘을 예비하시기 위해 생명을 보존 시켜주셨습니다. 그 후 가난하게 살았던 그 동네에 미군들과 영국군들이 많이 와서 축구를 했는데 저희가 따라다니면 그 군인들이 껌이나 사탕을 주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좋다고 막 쫓아다녔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교회에 가면 선물을 준다고 누군가 말한 소리를 듣고 그 당시 있던 장로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선물 때문에 교회를 다니게 됐고, 예수님을 믿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초등학교 2학년 초에 경기도 시흥시로 이사왔습니다. 이사 온 곳에서도 학교를 다니면서 계속 교회에 출석 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 배우가 되고 싶다고, 배우 되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열심히 기도하면서 연기를 하기 위해 어릴 적부터 수 많은 노력을 더해 배우가 될 수 있었습니다. 열심히 연기하며 신앙생활 하다가 결혼을 하게 됐습니다. 시흥에서 생활하다 결혼 후 서울 창전동으로 이사 와서 신혼살림을 시작하게 됐는데, 서울에서 시작한 신혼생활 또한 비참하기 이루 말할 수도 없었습니다. 우유값이 없어서 전당포도 수없이 들락날락할 정도였습니다.

그렇게 4년동안 고생을 하다 1975년도에 “윤진사댁 며느리” 라는 작품을 맡게 되었는데 그 당시 유명한 배우와 부부역할을 맡게 되었습니다. 제가 지금도 그분께 감사한 것은 신인 배우였던 제가 남편 역할인데 저를 거부하지 않고 오히려 도움을 주셔서 그 작품을 잘 마무리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후 ‘들장미’라는 작품에서 주연도 맡게 되었고 멜로 드라마, TV 프로그램, CF 등등에서 좋은 역할을 많이 맡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전성기를 누리면서 예수님과는 점점 멀어지게 되었습니다. 워낙 어릴 적부터 교회를 다녀서 예수님과 멀어져 교회를 다니지 않을 때에도 항상 허리띠에 십자가를 여러 개 달고 다니며 큰 일이 있을 때는 항상 “하나님 도와주세요”라고 기도를 하기도 했었고, 또한 요한복음 14장 1절 “너는 마음에 근심하시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나를 믿으라”라는 말씀을 힘이 들 때 묵상하며 살았습니다.

하지만 12년 동안 교회를 다니지 않으면서 그 생활 패턴 때문에 스스로 교만함에 빠져 내 세상에서 헤맸습니다. 그러다 12년만에 강남에 있는 한 성결교회에 출석을 하게 됐습니다. 같은 극단에 있던 선생님께서 저를 다시 전도 하신 것입니다. 저에게 왜 예수 믿지 않느냐고 학창 시절에 열심히 믿었는데 왜 지금 믿지 않느냐고 이야기 하시며 다시 교회에 나올 수 있게 이끌어 주셨고, 그 결과 지금까지 열심히 다니며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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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의 길로 인도하심을 받은 계기와 그 재능을 기독교 문화선교, 성극 등에 쏟아부으셨는데 그 과정을 소개해주세요.



1987년도부터 성극을 했습니다. 그때 임동진 목사님하고 사도 바울의 이야기를 담은 “일어나 빛을 발하라” 라는 작품을 했습니다. 이 작품으로 시민회관 별관에서 첫 공연을 시작으로 줄곧 연극을 했습니다. 이후 “더러운 손” 이라는 작품에서 예수님 역할을 맡게 되었는데 이때 예수님 역할이 참 힘들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실수를 안하시지만 역할을 맡은 저는 대사 실수를 할 수도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일반 사람인 베드로나 바울은 대사 한 두마디 정도는 틀릴 수 있지만 예수님의 말씀은 실수하면 안된다는 생각때문에 그 당시 힘들게 배역을 맡았던 것 같습니다. 그 후에 이런저런 성극을 했습니다.

그 후 “갈릴리로 가요”라는 공연을 했고, 공연 후 하나님께 이런 기도를 했습니다. 시편 71편 18절 말씀에 ‘하나님이여 내가 늙어 백발이 될 때에도 나를 버리지 마시며 내가 주의 힘을 후대에 전하고 주의 능력을 장래의 모든 사람에게 전하기까지 나를 버리지 마소서’라는 이 구절로 기도하며 ‘하나님, 늙을 때까지 저는 하나님의 영광으로 일하고 싶습니다’라고 기도했습니다. 이런 기도를 하고 있을 때 이민욱 선교사 감독께서 선교연극 하나를 만들어보겠다고 함께하자고 했습니다. 야곱의 내용을 가지고 작품을 만들었는데, 이 작품이 요즘 공연 다니고 있는 작품입니다.

이 야곱 작품은 최선자 권사님하고 둘이 나오는 공연입니다. 권사님은 앞에 조금 나오고 해설이 두 세번 나옵니다. 그 후에 있는 나머지 110분을 저 혼자 다 이끌어가야 했습니다. 모든 연극인들이 그렇듯 저는 온 몸을 다 바쳐 연극을 했고, 연극이 끝나면 온 몸에 땀이 나서 옷이 빨래한 것처럼 젖었습니다. 저는 무대에 서면 그 사람이 되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연극을 하면서 제가 이 야곱을 어떻게 이끌어가야 할까 고민하니 두 어깨가 짓눌리듯 너무나도 힘들었습니다. 힘들어하는 제 모습을 보신 하나님께서는 저에게 꿈으로 대답해주셨습니다. 꿈을 꾼것은 이때가 처음 이었습니다. 어느 모래 사막에 바람이 봄바람처럼 쫙 불며 그 모래들이 흩날려갔습니다. 그

러다 하얀 옷을 입은 사람이 제 옆에서 목각에 무언가를 썼는데 보니 “널리 쓰임 받을 것이니라”라고 써있었습니다. 이것을 보고 깜짝 놀라서 잠에서 깼습니다. ‘아, 하나님이 나를 또 이렇게 사용을 하시는거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이후에 여러 지역에서 공연을 했습니다. 교회가 초청하는 곳마다 저희가 가서 하고 있습니다. 세트도 없이 둘이서 2인극을 했습니다. 사례금이 많은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제가 가지고 있는 달란트는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이니 남은 생애는 저의 이 달란트를 널리 쓰임 받게 하실 하나님께 내 삶을 드리며 살아야겠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정치도 해보시려 했지만 그 길이 막히고 주어진 일과 재능으로 주께 영광돌리고자 간증으로 복음을 전하시는데 장로님의 계획과 기도제목을 말씀해주세요.

제가 시흥에서 살 때 청년회에서 활동을 했습니다. 회장도 해보고 이것 저것 많이 했었습니다. 또한 연기로 지방에 촬영하러 가면 그 지역 화백이나 서예가들이 선물을 주셨습니다. 그럼 그것을 팔아가지고 시흥 세종병원에 심장병을 앓고 있는 어린이들 수술비로 후원해서 건강을 되찾게 해주었습니다. 또한 독거노인 분들에게 쌀을 사다가 드리기도 하고 당시 도서가 없던 학교들에게 책도 갖다 주기도 했습니다. 정치적인 꿈을 가졌다기 보다는 제 고향을 사랑하는 순수한 마음으로 했습니다. 한 당에서 제가 시흥에서 많은 일들을 한 것을 보고 좋게 여겨 도의원 후보로 추천했습니다. 그리고 국회의원 러브콜도 왔었지만 정치를 잘 모르기도 했고 도의원에 만족했기 때문에 거절했고 도의원에 무난히 당선이 됐습니다. 그렇게 4년동안 도의원으로 지내며 많은 일들을 했습니다. 여러가지 도전도 했고, 했던 도전들도 다 잘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시흥 시장으로 추천을 받게 되었고, 제 후배들도 시흥시를 살리기 위해서 나와 달라고 부탁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문화 예술회관 하나도 없는 이 시흥에 문화 시장이 되어야 겠다고 마음을 먹고 나갔습니다. 당선이 될 뻔 했던 그 때 세월호 사건이 터졌습니다. 세월호 사건으로 인해 안산과 바로 옆에 있는 시흥에도 영향이 미쳐 민심은 떠나고 고배를 마시게 되었죠. 이렇게 떨어지게 되니 멘붕 상태가 와서 한동안 갈피를 잡지 못했습니다. 지인분들이 위로를 해주셔도 위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으로써 계속 기도하다 보니 예수님 그 한 분만이 저에게 위로가 되어 주셨고, 평안이 되어 주셨습니다. 위로자가 되어 주신 하나님께서 저를 드라마에 출연하게 해주시고 연극으로 돌아가서 다시 연극에 집중하게 해주시면서 이렇게 저를 불러 주심을 느꼈습니다. 그러면서 이제 정치는 하지 않으리라 하며 정신을 차리게 되었습니다.



아드님께서 아버지의 길을 이어받아 서울예술대학에서 연기과 교수로 섬기는데 자녀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씀을 해주세요.



저는 어릴 적 아들에게 배우를 하라고 권했지만 아들은 연기보다 음악을 더 좋아했습니다.  노래를 너무 하고싶어 했던 아들은 서울예술대학을 졸업하고 이태리로 가서 7-8년 동안 시립 음악원, 국립음악원에서 공부하고 졸업한 후에 디플로마를 받았습니다. 이후 한국으로 귀국을 해서 현재는 서울 예술대학교 전임교수로 재직 중에 있습니다. 제 아들에게 하나님의 은혜로 서울 예술대학까지 가게 된 것이라고 이야기 해주고 싶습니다. 또한 아들과 며느리의 이야기들을 들어보면 참 은혜가 많이 됩니다. 제가 아들에게 신앙적으로 특별한 가이드를 해주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어릴 적부터 대화를 참 많이 했고, 같이 놀러도 많이 다녔습니다. 또한 매주 주일에 예배를 같이 드렸고, 제가 간증하러 다니거나 선교 연극하러 다니는 모습들이 제 자녀에게 영향을 끼치게 된 것 같습니다. 저는 예수 믿으라 강요하진 않았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아들과 며느리가 열심히 예수님을 믿게 되었고, 이태리에서 유학하며 공부를 마친 모든 과정이 다 하나님의 은혜라고 믿습니다.



장로님께서 좋아하시는 성경구절과 재미교포 크리스찬들에게 신앙의 격려메시지 부탁드립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5). 저는 이 말씀을 참 사모합니다. 항상 마음에 와 닿습니다. 그래서 저는 우리 재미 교포분들이 이 말씀을 가지고 하나님을 믿으면서 하나님을 떠나지 말고 그 안에 거하며 우리의 몸 뿐만 아니라 영혼도 믿음의 길을 달려가다가 승리하는 모든 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또한 믿음, 소망, 사랑 속에서 늘 승리하는 삶을 살다가 천국에서 보길 소망합니다.

대담 노승빈 (크리스찬타임스 한국후원회 회장, 백석대 교수)·편집 정일균 (크리스찬타임스 한국후원회 부회장, 서울예대 교수)·정리 이주은 (크리스찬타임스 편집간사, 칼빈대학교 신학과) 

출처 : 크리스찬타임스(http://www.kctus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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