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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대표 33인, 양전백·길선주 목사

by 정보톡톡01 2019. 1. 15.

민족교육과 3.1운동에 앞장섰던 독립운동가 양전백 목사. 평안북도 의주군 고관면 상고리에서 태어나 양반 가문의 후예로 과거를 준비하기도 한 그는 1892년 친구 김관근과 서울에 갔다가 정동교회에서 열린 사경회에 참가하며 기독교인으로 거듭났습니다. 

양선백 목사


평북 구성으로 돌아와 한문과 한글, 성경을 가르치던 양 목사는, 청일전쟁으로 학당 운영이 어려워지자 휘트모어 선교사의 조사로 평양에서 통역 활동을 하며 교육사업의 일환으로 초등교육기관 명신학교를 설립했습니다. 1906년에는 선천읍교회 교인들과 함께 신성중학교를, 1907년과 1908년에는 각각 보성여학교와 대동고아원을 설립했습니다. 또 1907년에는 길선주 목사 등과 함께 장로회신학교를 1회로 졸업하며 목사 안수를 받았습니다. 

1910년은 양 목사에게 고난의 해였습니다. 일제가 자신들의 회유를 받아드리지 않았다는 이유로 105인 사건을 조작해 그를 체포한 것. 고문과 법정투쟁 끝에 무죄로 풀려난 양 목사는 1916년 조선예수교장로회총회의 제5대 총회장에 선출되기도 했으며,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참여해 독립운동을 전개하다가 재차 옥고를 치르기도 했습니다. 


1962년 정부는 신앙으로 깨어 민족교육과 독립운동에 앞장섰던 양 목사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습니다. 

한국교회 부흥운동의 창시자로 평가받는 길선주 목사. 청년 시절, 지인을 통해 신앙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기독교 서적들을 접하며 1897년 29살의 나이에 세례를 받게 됩니다. 1901년과 1902년에는 각각 장대현교회의 장로와 시무가 되며 전도활동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길선주 목사


길선주 목사의 관심은 신앙에만 국한되지 않았습니다. 조국의 상황을 걱정하는 마음에서 안창호 선생 등과 함께 17명의 애국지사로 구성된 독립협회 평양지부를 조직하고 사업부장을 맡기도 했으며, 기독교신앙운동을 통한 구국운동을 펼치겠다는 뜻으로 2,000여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장대현교회 건물을 세우기도 했습니다. 이 교회는 1907년 평양 대부흥운동의 발원지가 됩니다. 


양선백, 길선주 목사


한국교회의 부흥운동을 주도하고 새벽기도회와 가정예배를 시작했으며, 숭실학교·숭덕학교를 설립한 것으로도 유명한 길 목사, 독립운동가로도 잘 알려졌습니다. 민족대표 33인에 참여해 독립선언서를 공포했다는 이유로 2년 여의 옥살이를 치른 길 목사는 석방 후 부흥 운동 전개로 민족복음화 사역에 매진했습니다. 

각각 민족을 일깨우는 교육 사업과 민족복음화에 불을 지폈던 부흥운동으로 유명했던 양전백 목사와 길선주 목사, 민족대표 33인이었던 두 목사의 애국심과 신앙심이 오늘날 한국교회에도 귀감이 되고 있습니다. CTS뉴스 장현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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